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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귀여운 토끼 피터래빗 아세요? 피터래빗의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비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의 숨겨진(?)직업. 능력자 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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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귀여운 토끼 피터래빗 아세요? 피터래빗의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비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의 숨겨진(?)직업. 능력자 주의

예술가S 2019. 6. 13. 11:15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토끼 캐릭터는 뭘까요? 벅스바니? 미피?

정답은  바로 피터래빗 입니다.

피터래빗

피터래빗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요. 따뜻한 토끼 가족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토끼입니다. 최근에 영화로도 개봉했죠? 저는 쓰리디보다는 투디가 어땠을까 싶었지만... 피터 레빗의 작가의 이름은 Beatrix Potter 비아트릭스 포터입니다.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이름은 왠지 생소하시죠?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도 유명한데요. 세균학자, 곰팡이 학자로도 분류가 되고 있다는 점. 아시나요?

 

Beatrix Potter 비아트릭스 포터  [ 동화작가, 식물학자(세균학자, 곰팡이 학자), 환경운동가]

 

전형적인 빅토리안(Victorian) 가정 출신 

포터는 영국에서  니어소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중상류층 집안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녀의 아버지 포터씨는 급진적 정치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가 잦았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포터씨는 진보적이었지만, 그의 사고와 생활방식은 거꾸로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집안일이나 자녀교육은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가치를 철저히 지켰다. 당시 보수적인 중상층류 집안의 자녀는 대개 가정교사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는데, 특히 여자 애들이 그러했다. 베아트릭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런던 켄싱턴에 있는 4층짜리 저택의 꼭대기 층 방에서, 베아트릭스는 부모들과는 일상적인 접촉이 별로 없이 가정교사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집안에 갇혀 자란 그녀에게 세상사는  집안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6살 아래 남동생, 버트람(Bertram)과 함께 애완용 토끼, 다람쥐, 박쥐 등을 부모 몰래 들여다 키우면서 그들만의 동화세계를 꾸몄던 것은 집안의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상층 가정의 자녀로서 집안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시간을 메우려는 방편이었지만, 덕택에 감수성이 큰 어린 시절 베아트릭스는 상상세계를 맘껏 펼칠 수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후에 동화작가로서 성공하게 되는 배경에는 바로 어린 시절의 이러한 성장 경험이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과 습관은 남동생이 기숙사 학교로 떠나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그녀에게 동물과 대화하고 그들의 신체구조나 행동방식을 세심하게 관찰하고서 스케치하는 등의 행동은 일상의 무료함으로부터 탈출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후에 그녀의 이러한 관찰 습관은 더욱 깊어져, 동물들을 해부하거나 현미경으로 곰팡이의 번식과 성장 패턴들을 분석하고서, 이를 그림으로 옮기거나 글로 작성해 관련 학회에 발표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1901년까지 *베아트릭스는 실제 270여 종의 곰팡이 분석 그림을 완성했다. 덕분에 그녀는 해부학자, 세균학자, 곰팡이 학자 등으로 분류되어 해당 분야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세 때부터 베아트릭스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해 자기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도로비밀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기만이 아는 기호로 쓴 비밀일기는 사후 한동안 해독이 안 되다가 1958년에 레슬리 린더(Leslie Linder)에 의해 처음으로 읽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일기에는 비밀스러운 것이 별로 없었다. 혹자는 그녀가 비밀일기를 쓴 까닭이 역설적으로 비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왕립 식물원 (Royal Botanical Gardens)에서 곰팡이를 연구하기 위해 초청받았으며 수백 가지의 상세한 식물 그림을 제작하고 재배 및 성장을 조사했고, 그녀의 곰팡이 그림을 보다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베아트릭스는 아름다운 수채화 물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과학 일러스트 레이터가되었다. 1896 년까지 그녀는 곰팡이 포자가 어떻게 자라났는지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왕립 식물원 (Royal Botanical Gardens)의 책임자 인 윌리엄이 텔튼 다이어 (William Thiselton-Dyer)가 처음에 거부 한 종이 인 '아가리시스 균의 포자 발아'를 썼다. 그녀의 연구를 계속하면서 Beatrix는 1 년 후에 Kew 정원에서 일한 곰팡이 전문 가인 George Massee가 그녀의 논문을 Linnean Society of London에 발표하기로 동의했다. 그 당시 여성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이가 출판된 적은 없지만 과학자들은 오늘날에도 균 종 연구에 대한 그녀의 공헌을 인정한다.


여름휴가, 레이크 디스트릭으로의 여행

레이크 디스트릭

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 진짜 극적 탈출은 여름마다 긴 휴가를 떠나는 일이었다. 베아트릭스가 5세였던 1871년 여름부터 식구 모두는 집 전체를 옮길 정도의 짐을 싸서 스코틀랜드 퍼드 셔(Perthshire)의(Perthshire) 대저택에서 3개월씩 머물렀다. 이 긴 여름휴가 동안 베아트릭스와 동생 버트람은 런던에서 누르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지고 산과 들판을 쫓아다니면서 동물을 찾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이는 런던 집에서 침잠하던 내면의 상상(동화) 세계가 이젠 자연의 세계로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스코틀랜드로의 휴가는 그 후 11년간 계속되었다. 1882년 새로운 집주인이 집세를 턱없이 높게 부르는 바람에 포터 씨는 휴가지를 잉글랜드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로 옮겼다. 베아트릭스가 16세가 되던 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모들의 고향(랭커스터)(랑카스터근방, 즉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누린 자연과의 교감은 후에 완성될 그녀의 자연주의 동화세계를 채워주는 소중한 기초들이 되었다. 이렇게 매년 아름다운 호수지역에서 여름을 지내지만, 그 후엔 런던으로 돌아와서 꾸리는 삶도 중요했다. 


피터 레빗의 이야기 출판, 그리고 성공

유복한 가정에서 엘리트 코스만을 밟고 자란 포터는, 뼈대 있는 집안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올리는 것이 당대 여성들의 목표였던 것에 반해 그녀는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20살이 될 무렵, 베아트릭스는 도시생활의 권태로움을 달래고자 곰팡이를 연구하거나 셰익스피어 작품을 외우는 일 등에 심취했다. 애완동물과 관련해서는 특히 토끼에 관한 스케치를 많이 했다. 그렇게 해서 1890 24세가 되던 해, 그녀는 연하장 (greeting cards) 6개 디자인을 팔아 생전 처음으로 6파운드를 벌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동물 만화를 그리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상안을 가지고 여러 출판사를 접촉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쓰라린 좌절이었다. 이 때문에 그 후 10년간 베아트릭스는 책을 내겠다는 어떠한 희망도 품지 못했다. 그러다가.1900 하드윅 론슬리가 베아트릭스에게 어린이용 그림책 출판을 정식으로 권유하게 되면서 그 꿈은 다시 살아났다. 출판을 성사시키도록 하드윅 론슬리는 그녀의 그림이나 글을 손수 재구성하고 출판사를 직접 접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출판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베아트릭스는 자비를 들여 책을 내기로 작정했다. 그 유명한 피터 래빗의 이야기’(초기 250부 주문, 후에 200부 추가)는 이렇게 해서 1901년 세상에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에 들어간 그림과 이야기는 이미 7년 전(1893)에 마련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여름 휴가지에서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무어 부인의 다섯 살짜리 아들인 노엘의 병문안을 위해 네 마리 아기 토끼(프롭 시,(프롭시몹시, 코톤테일코톤테일,피터) 이야기를 그린 편지를 보냈다. 피터 래빗은 이 그림편지를 다듬어서 엮어낸 것이었다. 책에 대한 반응이 좋아 추가 제작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이듬해 (1902) 10월 2일 출판사(Warne, 1919년 이후 Fredrick Warne and Co. Ltd.로 개칭)가 나서서 6천부를 정식으로 출판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처음으로 자기수입을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 나이 36세가 되던 해였다.


다시, 자연

힐탑의 그녀의 집

1905년 포터는 레이크 디스트릭 에 거주지를 옮긴 후, 그동안 책을 팔아 모은 돈과 자신의 유산을 모두 합쳐 그 곳의 땅과 농장, 집을 구입했다. 그녀가 그 곳에 땅을 사게 된 이유는 개발 위기에 놓인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더이상 파괴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포터는 농장 14곳과 집 20채, 땅 4000에이커(약 500만 평)를 환경단체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하였다. 그해 노먼은 포터에게 청혼하고 한 달 뒤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포터는 더욱 일에만 몰두하며, 40세가 넘도록 홀로 지내었고, 47세에 자신의 변호사인 윌리엄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1943년 12월22일 니어소리 에서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포터는 《피터 래빗》 의 탄생 배경이 된 500만 평에 이르는 땅과 농장, 저택을 기부하며 자연 그대로 잘 보존해 달라는 단 한가지 유언을 남겼다. 현재까지도 포터의 유언대로 피터 래빗이 탄생한 "레이크 디스트릭"은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보존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작은 시골마을 힐탑에서 살면서,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민간단체 중의 하나인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포터가 사망한 3년후인 1946년 힐탑에 있는 그녀의 집이 대중에 공개되었고, 현재까지도 매년 7만 5천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가고 있다.

영국 아동문학 작가이자 일러스트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는 꽃과 채소, 작은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진 정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릴 적 <피터 래빗 이야기> 등 베아트릭스 포터의 책을 읽었거나 아이나 손자에게 그의 책을 읽어 준 이들에게 영국 니어 소리 마을의 힐 탑은 친숙하게 다가온다. 힐 탑은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이다.


 

힐탑에 있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땅을 사모으는 것을 보며 이웃사람들은 그녀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했으나. 그는 자연의 보존을 위해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당시에 그를 바보같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영국의 자연환경에 얼마나 이바지를 했는그녀의 식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네요.  더불어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로도 너무 유명하지만 곰팡이분야에서도 공로를 인정받다니. 능력있는 사람들을 쫓아가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찾아보니 그녀에대한 영화도 있더라고요. 시간될때 한번 봐야겠습니다. 평점이 좋더라고요.

영화이름은 미스포터 입니다.

피터레빗의 공식 사이트 입니다. https://www.peterrabbit.com/

 

Home Page | Peter Rabbit

The official home of Peter Rabbit, Beatrix Potter's famous character from the books.

www.peterrabb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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